2014년 3월 5일 수요일

[Book #22] 강신주의 감정수업



과거 강신주 저자의 몇가지 책들을 추천드린 적이 있습니다. 특별하게 특정 작가에게 치우친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보니 해당 작가에 대한 애정이 좀 있긴 한것 같습니다. 최근에 힐링캠프 프로그램에 나왔다는 얘기를 듣고 다시 보기로 찾아 보니 책으로는 또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도 함께 돌아 오고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을 무수히 던져주었습니다. 못보신 분들이 있다면 추천 드립니다. ^^ 

우리는 지금의 사회 활동(직장, 가족, 친구등)을 만나고 살면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살수 밖에 없고 그렇게 살아야 도덕적이고 잘사는 사람을 기억되고 배워 왔습니다. 저 개인또한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지요. 하지만 그 억눌렀던 감정 자체도 어떤 감정인지 명확하게 정의하지 못했습니다. 사랑인지 증오인지 경멸인지, 당황인지... 등등  그러한 감정들의 표현이 좀더 쉽게 해외의 작가들의 작품을 통한 해당 감정을 이해시키고 있습니다. 훨씬더 쉽게 읽어내려 가실 수 있습니다. 


가슴으로 기억되는 부분을 발췌 합니다. 
희망(spes)은 우리들이 그 결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의심하는 미래나 과거의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불확실한 기쁨(inconstans laetitia)이다. 
- 스피노자 "에티카"에서 page 442 .  

항상 그림자를 곁에 두고 있는 나무를 생각해 보자 나무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림자도 그 만큼 커지고 길어진다. 그림자의 검은빛을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동시에 그는 큰 나무의 웅장함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지만 나무를 그대로 도구 그림자를 반으로, 나아가 반에 반으로 중리려는 그의 소원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이다. 그림자를 줄이기 위해서는 크고 웅장한 나무를 자르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희망도 마찬가지다. 미래의 불확실성이 싫어서 그것을 줄이려고 한다면, 우리는 희망 자체를 그 만큼 잘라내야 한다. 잊지 말자. 나무가 있기에 불확실성도 발생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따라서 불확실성이 견디기 힘들도록 무섭다는 이유로 희망의 싹을 자르려고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 중략...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를 가진 현재에 살고 있습니다.  머리속에 항상 맴돌게 됩니다. 이것이 과연 성공할까? 할수 있을까? 라고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사람도 도구도 없습니다. 그리다고 우리가 희망을 갖지 말고 줄여야 할까요?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질문 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사람에 맞춰져야 합니다. 그 사람 자체에 희망을 가진다면 불확실성에 두려워하는 두려움보다 더 큰 확실함의 신뢰를 가져다 줄수 있고 결국에 그 신뢰는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 교보문고 소개글 중 발췌.

이성과 감성, 인간은 이 두 가지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온전한 삶을 이룰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가부장제와 물질만능주의가 야기하는 억압적인 구조 아래에서 감정을 억누르며 살 수밖에 없다. 이성이 절대 위치에 있는 철학 전통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데 감정이 중요한 키워드임을 주지시켰던 ‘혁명적인’ 철학자가 있었으니, 바로 17세기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교회에서 파문당한 스피노자다. 스피노자는 『에티카』 3부에서 인간의 감정을 크게 48가지로 분류하고, 그와 유사한 감정들을 비교하면서 파고들었는데, 인간의 감정을 이토록 세분해서 소개한 철학자는 없었다. 대중과의 소통을 소중히 여기는 철학자 강신주 박사는 자아를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에게 지금 시급한 문제는 바로 자기 감정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철학자의 어려운 말을 독자에게 쉽게 전달하기 위하여 위대한 심리학자와도 같았던 작가들의 이야기에서 예를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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